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게오르기 주코프 (문단 편집) ==== [[모스크바 공방전]] ==== 1941년 10월에 독일군은 태풍 작전을 실행하여 수도 [[모스크바]]를 함락시킬 기세로 진격하고 있었다. 레닌그라드에 있던 주코프는 스탈린의 지시로 모스크바 방위 사령관에 임명되어 건강이 나쁜 총참모장 샤포시니코프를 대신한 총참모장 대리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중장과 모스크바 방어전을 지휘하게 됐다. 당시 독일군은 [[바르바로사 작전]] 때 [[아돌프 히틀러]]의 명령 때문에 모스크바를 곧장 공격하지 못했고, 키예프로 갔다 레닌그라드로 갔다하는 등 갈팡질팡하는 작전을 벌이고 있었다. 특히 남부집단군이 주코프가 키예프 군관구 사령관 시절 육성한 강력한 소련군 부대 덕분에 진격을 제대로 하지 못하자 중부집단군의 선두 부대였던 [[하인츠 구데리안]]과 [[헤르만 호트]] 휘하 기갑군을 각각 남부, 북부집단군으로 내려 보낸 탓이 컸다. 구데리안은 이 조치에 강력하게 항의했으나 히틀러는 남 말 안 듣는 걸로는 [[이오시프 스탈린|자기 숙명의 라이벌]] 뺨치는 수준의 인간이라 그냥 씹혔다. 다만 이로 인해 키예프에서는 50만명에 달하는 소련군이 포위되어 전멸했다. 무엇보다 현대에는 키예프 공략도 전략적으로 나름 중요했다고 평가받기도 하는데 우크라이나 지방을 완전히 손에 넣는 것과 뒤치기 방지 등에서 필요한 일이었고 심지어는 키예프에서 헛짓거리 하느라 모스크바를 못 먹은 것이 아니라 키예프를 먹었기에 모스크바 공략을 시도할 수 있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덕분에 소련군은 모스크바 방어를 위한 충분한 시간을 얻었다. 주코프는 주어진 시간을 활용해 [[공병]] 부대들을 동원하여 모스크바 둘레에 종심이 깊고 튼튼한 거점 방어망들을 건설했고, [[시베리아]]에서 후송된 추위에 단련된 병력들과 [[우랄 산맥]] 동쪽에서 보급된 군수 물자를 재빨리 배치시켰다. 이 전투에서 독일군은 [[크렘린]]이 망원경으로 보일 정도로 모스크바에 가깝게 접근했지만, 결국 소련군의 방어망을 뚫지 못하고 후퇴하면서 독소전쟁이 장기전으로 가게 되는 계기를 만들고 말았다. 방어에 성공한 주코프는 개전 이래 처음으로 모스크바 근교의 클린에서 독일군에게 제한적인 반격을 가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모스크바 방어 성공에 지나치게 기고만장해진 스탈린은 1942년 봄이 되자 전 전선에서 독일군을 공격한다는 무리한 작전인 '동계 공세'를 수립할 것을 명령했다. 주코프는 이 어이없는 계획에 당연히 반대했지만, 스탈린은 그를 해임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결국 동계 공세의 일환으로 진행된 [[르제프 전투#s-1.1.1|제1차 르제프 전투]],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 [[https://en.wikipedia.org/wiki/Demyansk_Pocket|데미얀스크 포위전]] 등에서 소련군은 다시 연패했고, 독일군은 소련 남부 공략을 더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정신없이 밀리던 전세를 겨우 반반으로 맞춰뒀더니 장대한 자폭으로 나치에게 1년을 거저 줘버린 공세였다. 스탈린은 자신의 전략이 실패했음을 깨닫고 의기소침해졌으며, 결국 주코프를 최고사령관 대리 겸 총군부사령관에 임명해 소련군의 전체적인 지휘권을 사실상 위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